2022 녹색자금사업 ‘우리동네 녹색자금 이야기’ 사진ㆍ수기 공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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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명

녹색자금이 되찾아준 건강

작품 설명

정승권


극심한 흉통에 시달리다가 쓰러져 응급실에서 깨어났을 때 의사는 내게 심근경색이라고 말했다
. 혈관 협착이 심해 약물이나 스텐트 시술 대신 개복수술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말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가슴을 여는 대수술을 받고 나는 하루아침에 중환자가 돼버렸다. 현실적인 문제에 쫓겨 사느라 내 몸 하나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하고 살아온 결과였다. 오랫동안 다닌 회사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퇴사까지 하게 되자, 삶이 벼랑 끝에 몰린 것 같았다. 분노와 원망, 걱정과 두려움이 뒤범벅되어 가슴을 짓눌렀다.

수술 부위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을 때쯤 의사는 내게 힘들어도 꼭 운동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계단을 조금만 올라가도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두방망이질 치고 턱 끝까지 숨이 차올랐다.

아내와 논의한 끝에 나는 사촌형이 살고 있는 경상북도 영천으로 내려가 당분간 요양을 하기로 결정했다. 사촌형은 몸을 회복하기 위해 시골로 내려온 나를 안쓰럽게 봐주었다. 젊은 나이에 지병을 얻어 개복수술까지 한만큼 팍팍했던 일상을 내려놓고 공기 좋은 곳에서 푹 휴식을 취하라고 다독여주었다.

사촌형은 힘들어도 꼭 운동을 해야 한다고 의사가 신신당부를 했다는 말에, 시골집 근처에 있는 운주산에 다녀보면 어떻겠느냐고 내게 제안했다. 산이라는 단어에 나는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조차 버거운 몸으로 산에 오를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던 것이다.

수술 전까지만 해도 틈틈이 산에 다녔었는데, 몸이 무너지고 나니 정돈되지 않고 가파른 길이 많은 산행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됐다. 몸을 회복하는데 자연만큼 좋은 휴식처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병마의 노예가 되어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내 신세가 퍽 서글펐다.

하지만 사촌형은 운주산에 무장애나눔길이 생겨 내 경우에도 큰 어려움 없이 산행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무장애나눔길이라는 명칭이 생소해 사촌형에게 물어봤더니, 계단이나 요철을 없애고 평탄하게 길을 연결해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는 슬로우 길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운주산 무장애나눔길은 영천시가 2017년 한국산림복지진흥원의 녹색자금지원사업에 선정돼 녹색자금을 지원받아 조성한 일종의 복지형 숲길이었다. 나처럼 몸이 아픈 사람이나 산림으로의 접근이 어려운 장애인, 노약자, 임산부 등도 안전하게 산을 둘러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산책로라는 말에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희망이 샘솟아 올랐다.

 

부푼 마음을 안고 용기를 내서 찾아간 운주산 무장애나눔길 초입, 한눈에 보아도 경사가 완만한 데크 산책로가 나를 반겼다. 기다렸다는 듯 자연 속을 향해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옮겼다. 사라락.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 소리가 소란스러웠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주었다.

데크 산책로의 경사가 완만해서 계단을 탈 때 느껴지던 가슴 통증과 과호흡 증세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덕분에 부담감을 내려놓고 녹음 짙은 나무들 사이를 걸으며 산행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천천히 풍경을 음미하면서 걷는 것이야말로 산을 제대로 느끼는 방법이라던 누군가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자연의 속도에 발맞춰 되도록 천천히, 느리게 걸었다. 느리게 걸을수록 가슴을 짓누르던 온갖 걱정과 잡념들이 떨어져나가는 듯 했다.

운주산 숲속 산책로에는 군데군데 보행약자를 위한 다양한 배려가 숨겨져 있었다. 안전 난간, 전동휠체어 급속충전기, 점자표지판, 점자 보도블록, 쉼 의자와 테이블 등이 설치되어 있어, 몸이 불편한 이를 배제하지 않고 모두 함께 거닐 수 있도록 배려한 점이 감동스러웠다. 운주산 무장애나눔길은 말 그대로 장애 없고, 차별 없는 숲길이었다. 개복수술 후 산행은 도저히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무장애나눔길이 내 편견을 보기 좋게 깨주었다.

저만치서 산책을 하는 한 가족의 화기애애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휠체어를 타고 가는 아빠와 어린 아이의 손을 잡은 엄마의 밝고 편안한 모습이 무장애나눔길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주었다.

운주산 숲속 산책로에는 여느 산행에서 흔히 마주칠 법한 암석지대도 없었다. 대신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이 불편함 없이 숲을 느끼고 즐기기를 바라는 따스한 마음만이 존재했다.

무장애나눔길에서는 쉬어가는 의자마저 편하고 푸근했다. 나는 의자에 앉아 가만히 지나온 시간들을 되짚어보았다. 예기치 않은 질병으로 인해 큰 좌절을 맛보았지만, 앞으로는 내 삶도 무장애나눔길처럼 아무 장애 없이 평평하게 쭉 뻗어나갈 수 있기를 기원했다.

운주산 무장애나눔길은 몸이 불편한 내게 산행의 기쁨을 선물해주었고, 일상의 여유를 찾을 수 있게 넉넉한 품도 내주었다. 영천에 머무르는 동안 나는 수시로 운주산에 올랐다. 무장애나눔길을 걸으며 방전된 체력을 충전했고, 스스로 만든 병마의 공포로부터도 벗어났다.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건강도 시나브로 회복되어 갔다. 병마와 싸우던 내게 운주산 숲속 산책로는 최고의 휴식처이자 쉼터였다.

6개월여 간의 요양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날, 나는 사촌형에게 고마움을 전한 후 운주산 무장애나눔길로 향했다. 내가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이끌어준 운주산을 마음 깊이 담아두고 싶어서였다.

수없이 오갔던 데크 산책로를 걸으면서 몸이 불편한 나를 밀어내지 않고 품어준 운주산 무장애나눔길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그 순간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 귓가를 간질이며 스쳤다. 마치 내게 무장애나눔길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으니 힘이 들 때면 언제든 다시 찾아와서 쉬어가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통상 보행약자는 숲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데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일반인 입장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장애인을 포함한 수많은 보행약자들은 사소한 부분에서도 큰 불편을 느끼고 때론 안전을 위협받기도 한다.

현재 전국적으로 100여개의 무장애나눔길이 있고, 내가 사는 지역 인근에도 무장애나눔길이 조성되어 있다. 앞으로도 계속 우리 주변에 무장애나눔길이 만들어져서, 모두가 불편함 없이 언제든 산에 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산이 편안한 삶의 쉼표가 되어주었으면 좋겠다